“이런 경험 나만 하는건가?”
2015년에 네이버 블로그에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다. 잠이 들랑 말랑 할 때 – 데이지블로그 그때 나는 이 현상이 뭔지 몰랐다. 잠이 완전히 든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히 깨어 있는 것도 아닌 상태. 주변 소리는 다 들리고 의식도 어느 정도 남아 있는데, 생각은 평소와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하는 시간. 말 그대로 그때 제목에 썼던 것처럼 ‘잠이 들랑 말랑 할 때’였다. 그 시간에 가끔 오래된 기억들이 갑자기 떠올랐다. 특히 엄마의 얼굴이나 엄마가 했던 말들이 그랬다. 평소에는 잘 생각하지 않고 사는데 이상하게 그 순간만큼은 아주 오래전의 기억과 감정이 선명해졌다. 그리고 잠이 깨면 갑자기 슬퍼졌다.
당시 글에는 이렇게 적어두었다. ’10년이란 시간동안 정말 많이 무뎌지고 평소엔 미안할 만큼 생각을 안하고 살지만, 이 경험을 할 때는 꼭 마치 그 일이 일어나기 전이나 직후처럼 슬픈 감정들이 아주 선명하게 떠오른다.’ 지금 다시 읽어보면 조금 신기하다. 당시에는 이런 현상을 설명할 단어 하나도 몰랐는데, 반복해서 겪던 일을 나름대로 꽤 자세히 기록해두었다. 그리고 이런 생각도 했다. ‘경험했던 모든 것들이 뇌 어딘가에 저장되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스스로 꺼내지 못할 뿐이지.’ 그 글을 쓰고 11년이 지났다. 11년 뒤에야 이 상태에 ‘입면기’라는 이름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유튜브 댓글 하나에서 다시 떠오른 기억
얼마 전 유튜브에서 아주 잘 만든 작품 하나를 봤다. 보면서 자연스럽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런 건 대체 어떻게 생각해내지? 그러다 댓글 하나를 봤다. “이런 건 어떻게 만드나요? 잠들기 전에 갑자기 떠오르나요?”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댓글인데 이상하게 그 문장이 머리에 남았다. 잠들기 전에 떠오른다. 그 문장을 보는 순간 예전에 내가 썼던 글이 생각났다. 나도 그 시간에 뭔가가 떠오르곤 했으니까. 그래서 처음으로 제대로 찾아봤다. 그리고 내가 경험하던 시간에 이름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잠들기 직전 떠오르는 생각, 입면기란?
잠과 깨어 있음 사이의 전환 상태를 입면기(hypnagogia)라고 한다. 깨어 있다가 잠으로 넘어가는 아주 짧고 애매한 시간. 이때는 외부 세계에 대한 주의가 조금씩 약해지면서 이미지나 소리, 기억과 생각들이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불쑥 나타날 수 있다고 한다. 생각해보면 나는 이 상태를 꽤 잘 알아차리는 편인 것 같다. 누워 있다가 갑자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면 ‘아, 나 또 이상한 생각 하고 있네. 곧 잠드려나 보다’ 하고 생각할 때가 많다. 입면기라는 이름을 몰랐을 뿐, 그 상태가 오는 느낌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셈이다.
검색해보니 입면기와 함께 자주 등장하는 단어는 환청, 수면마비, 가위눌림, 근경련 같은 것들이었다. 입면기와 함께 나타날 수 있는 경험들이다. 그런데 내가 궁금했던 건 조금 다른 쪽이었다. 왜 하필 이 시간에는 평소에 생각하지 않던 것들이 갑자기 떠오를까. 그리고 왜 그 생각들은 평소보다 조금 더 자유롭게 연결되는 것처럼 느껴질까. 내가 찾아본 한국어 글들은 많지 않았지만, 그중에는 이 시간을 단순히 불편한 수면 현상으로만 보지 않고 기억과 이미지, 창의적인 사고가 나타나는 독특한 경계 상태로 설명하는 글도 있었다. 그쪽 이야기가 훨씬 재미있었다.
잠들기 직전은 ‘창의적인 틈’일까
찾아보다 보니 잠들기 직전의 이 애매한 시간이 창의성과도 관련이 있다는 연구가 있었다. 실제로 완전히 잠들기 전 잠깐 졸았던 사람들이 계속 깨어 있던 사람들보다 문제 속 숨은 규칙을 더 잘 발견했다는 실험도 있다고 한다. 연구자들은 이 시간을 아예 ‘creative sweet spot’, 창의적인 생각이 떠오르기 좋은 순간이라고 표현했다. 달리나 에디슨이 의자에 앉아 손에 물건을 쥔 채 졸다가 물건이 떨어지는 순간 깨곤 했다는 유명한 이야기도 있다. 아예 깊이 잠들기 전에, 막 잠으로 넘어가는 그 순간의 생각을 붙잡으려 했다는 것이다. 이쯤 되니 유튜브 댓글이 다시 떠올랐다. “이런 건 어떻게 만드나요? 잠들기 전에 갑자기 떠오르나요?” 생각보다 꽤 그럴듯한 질문이었던 셈이다. 평소라면 “말이 안 되는데?” 하고 바로 버렸을 생각도, 논리적인 사고가 조금 느슨해지는 순간에는 전혀 관계없어 보이던 기억이나 이미지와 연결될 수 있는 걸까.누군가에게는 멜로디가 떠오르고, 누군가에게는 문장이 떠오르고, 누군가에게는 그림이 떠오르는 식으로.
그런데 이것도 해본 적이 있다 — 테트리스 효과
입면기를 찾아보다가 테트리스 효과(Tetris effect)라는 것도 다시 만났다. 어떤 활동을 오랫동안 반복하고 나면, 그만둔 뒤에도 관련 이미지나 움직임이 계속 머릿속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건 나도 정확히 경험해본 적이 있다. 한때 테트리스를 정말 좋아해서 꽤 오래 했는데, 잠자리에 누워 눈을 감으면 테트리스 블록이 실제로 계속 떨어졌다. 그냥 “게임 생각이 난다” 정도가 아니었다. 블록이 내려오고, 어디에 맞춰 넣어야 할지 머릿속에서 계속 이어졌다. 그때는 당연히 ‘테트리스 효과’라는 이름도 몰랐다.그냥 게임을 너무 많이 해서 그런가 보다 했다. 돌이켜보면 이름을 몰랐을 뿐, 나는 이런 잠과 의식의 경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꽤 오래 경험해왔던 것 같다.
꿈에서도 가끔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나온다
입면기와 꿈은 같은 현상은 아니다. 그래도 이걸 찾아보다 보니 내가 왜 예전부터 꿈에 유독 관심이 있었는지도 조금 이해가 됐다. 살면서 두세 번쯤은 꿈에서 깨자마자 정말 진지하게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와, 이거 영화로 만들면 대박인데? 설정도 기가 막히고, 이야기도 너무 새롭고, 꿈속에서는 내가 세상에 없던 엄청난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 같았다. 문제는 늘 똑같았다. 까먹는다. 막 깼을 때는 분명 장면도 있고 스토리도 있고 감정도 있었는데, 조금만 지나면 희미해진다. 나중에는 “진짜 대박이었는데…”라는 감탄만 남고 정작 뭐가 대박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입면기에 떠오른 생각도 비슷하다. 그 순간에는 분명 생생하다. ‘이건 기억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은데, 아침이 되고 나면 대부분 사라져 있다. 꿈이 깨어나는 순간부터 빠르게 증발하는 것처럼. 그래서 어쩌면 2015년에 그 글을 써둔 게 꽤 잘한 일이었다. 기록하지 않았다면 내가 이런 경험을 반복해서 했다는 사실 자체를 지금은 잊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폴 매카트니의 꿈, 그리고 엄마
잠과 창작에 관한 글을 보다 보니 폴 매카트니의 이야기도 만났다. 그는 어려운 시기를 보내던 어느 날 꿈에서 오래전에 세상을 떠난 어머니를 만났다고 한다. 꿈속의 어머니는 걱정하지 말라는 뜻의 말을 건넸고, 그 경험은 훗날 <Let It Be> 의 영감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입면기와 꿈은 엄연히 다르기 때문에 내 경험과 같은 현상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런데도 이 이야기가 유난히 마음에 남았다. 나에게 잠들기 직전의 그 시간은 오래전부터 엄마의 얼굴과 말이 이상할 만큼 선명하게 돌아오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잠과 깨어 있음 사이에서 새로운 멜로디를 만나고, 누군가는 오래된 사람을 다시 만난다. 그 차이가 조금 묘하게 느껴진다.
11년 전의 질문에 이제야 답해보기
2015년 글의 마지막에는 이렇게 썼다. ‘이런 경험 아무도 안 해봤을 것 같아서 주위에 이야기도 안 해보고 그냥 블로그에 기록해본다.’ 11년이 지나고 나서야 알았다. 나만 경험하는 일은 아니었다. 이름도 있었다. 입면기. 잠들기 직전 아주 잠깐 열리는 세계. 누군가에게는 불편하거나 무서운 경험이 나타날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오래 잊고 있던 사람이 떠오를 수도 있고,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작품의 시작이 되는 문장이나 이미지가 찾아올 수도 있다. 나는 아직도 그 시간에 왜 엄마의 얼굴이 그렇게 선명하게 떠올랐는지는 모른다. 그리고 정말 경험했던 모든 것이 뇌 어딘가에 그대로 저장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2015년의 내가 쓴 그 문장을 과학적인 사실처럼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그때의 생각은 지금도 꽤 마음에 든다. ‘내가 스스로 꺼내지 못할 뿐이지.’라고 생각했던 것 말이다. 잊었다고 생각했던 기억들도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평소에는 잘 생각나지도 않던 것들이, 잠이 들랑 말랑할 때 갑자기 튀어나오는 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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