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가 되어 다시 본 <레볼루셔너리 로드>

30대가 되어 다시 본 <레볼루셔너리 로드>

예전에 쓰던 네이버 블로그를 뒤적이다가 2013년에 쓴 짤막한 글을 발견했다. 그때의 나는 24살이었고, <레볼루셔너리 로드>를 보고 마지막에 이런 말을 남겨놨다. “아마 서른 살쯤 다시 보면 또 다른 느낌을 받을 것 같음.” 그리고 정말 다시 봤다. 서른 살은 조금 많이 지나서, 서른일곱 살에. ㅋㅋ 그 사이 나는 결혼을 했고 두 아이의 엄마가 됐고, 직장을 다니며 살아가고 있다. 24살 때도 분명 현실적이고 공감되는 영화라고 생각했던 모양인데 지금 다시 보니 그때 내가 대체 뭘 보고 그렇게 공감했다는 건지 조금 웃기기도 했다. 정말 완전히 다른 영화처럼 느껴졌으니까..!

※ 결말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넷플릭스에서는 2026년 9월 19일까지 볼 수 있다고 하니 안 보신 분들은 그전에 보시길 🙂

우리는 특별한 사람들이니까

프랭크와 에이프릴은 자신들이 주변의 평범한 부부들과는 조금 다르다고 생각한다. 교외의 예쁜 집에서 두 아이를 키우고, 남편은 매일 같은 회사로 출근하고, 아내는 집에서 아이들을 돌보는 남들이 보기엔 부족할 것 없는 안정적인 삶인데도 둘은 그 안에서 계속 답답함을 느낀다. 특히 자신들은 원래 이런 평범한 삶을 살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사실 이 부분이 굉장히 공감됐다. 우리 부부도 우리끼리는 꽤 자주 우리가 조금 특별한 부부라고 생각하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꼭 남들이 사는 방식대로 살아야 하나, 하고 싶은 게 있으면 해보면 되지 않나 하는 마음이 늘 있었고, 실제로 아이까지 데리고 캐나다로 떠날 준비도 했었다. 그래서인지 프랭크와 에이프릴의 생각이 마냥 허영이나 철없는 망상처럼 느껴지지는 않았다.

“내가 일할게. 당신은 하고 싶은 일을 찾아.”

이번에 다시 보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사람은 에이프릴이었다. 파리로 가자는 것도 에이프릴이고, 가서 자신이 일을 하겠다고 말하는 것도 에이프릴이다. 프랭크에게는 그동안 자신이 정말 하고 싶었던 일이 무엇인지 찾아보라고 한다. 지금 들어도 꽤 대담한 제안인데 영화의 배경은 1950년대다. 남편이 가족을 부양하고 아내는 집과 아이들을 돌보는 것이 너무나 당연했던 시대에 에이프릴은 그 역할을 완전히 뒤집어 “당신은 하고 싶은 일을 찾아. 일은 내가 할게.”라고 말한다. 나는 이 모습이 꽤 멋있었다. 내가 원하는 여성상이기도 하고. ^^ 에이프릴이 원했던 건 어쩌면 파리라는 장소 자체보다 이미 정해져 있는 삶의 방식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었을까? 단순히 파리에 가고 싶다는 것보다 우리 인생을 꼭 남들이 사는 방식대로 살 필요는 없잖아라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더 좋았고, 그래서 더 에이프릴에게 마음이 갔다.

우리도 떠나려고 했었다

그래서인지 영화를 보는 내내 우리 부부가 캐나다에 가려고 했던 일이 계속 생각났다. 우리도 그냥 언젠가 해외에서 살아보자고 말만 했던 게 아니라 당시 세 살이었던 첫째를 데리고 밴쿠버까지 가서 비자를 받아왔고 임시로 어디에서 살지 알아보는 등 실제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주변에서는 당연히 왜 굳이 가려고 하냐고 했다. 지금도 잘 살고 있는데 왜, 아이까지 있는데 왜..? 그런데 당시의 우리에게는 그게 그렇게 이상한 선택이 아니었다. 가보고 싶었고, 다른 곳에서 살아보고 싶었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질문을 받을수록 오히려 우리는 우리가 조금 특별한 부부라고 생각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영화 속에서 프랭크와 에이프릴이 파리로 떠나겠다고 했을 때 주변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도 묘하게 익숙했다.

하지만 우리는 떠나지 않았다

우리의 계획도 결국 무산됐다. 둘째가 생겼기 때문이다. ㅎㅎ 영화를 보면서 이 부분에서는 정말 묘한 기분이 들었다. 파리로 떠날 준비를 하던 부부에게 임신이 찾아오고 결국 그 계획이 틀어지는 이야기와, 캐나다로 떠날 준비를 거의 마친 상태에서 둘째가 생기면서 계획이 완전히 바뀐 우리의 상황이 얼핏 보면 꽤 닮아 있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었다. 우리는 원래 둘째를 원했고, 임신을 알게 됐을 때 캐나다에 못 가게 됐다는 아쉬움보다 아이가 찾아왔다는 기쁨이 훨씬 컸다. 우리에게 둘째는 계획을 망가뜨린 존재가 아니라 선물이었고, 그래서 캐나다행을 포기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삶의 계획은 완전히 바뀌었지만 내가 원하지 않는 삶에 갇혔다고 느끼지는 않았다. 같은 ‘임신 때문에 떠나지 못하게 된 상황’처럼 보이지만 그 임신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아마 그래서 더 에이프릴의 마음을 오래 생각하게 됐던 것 같다.

24살에는 몰랐던 영화

24살의 나는 이 영화를 보고 “부부가 뭔지, 사랑이 뭔지 생각해보게 되는 영화”​라고 썼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서른일곱 살에 다시 본 <레볼루셔너리 로드>는 나에게 사랑에 관한 영화라기보다 삶에 관한 영화에 가까웠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일을 하고, 하루하루 살아가다 보면 어느 순간 지금의 삶이 정말 내가 선택한 삶인지, 그냥 여기까지 흘러온 삶인지 생각하게 될 때가 있다. 그리고 결혼한 두 사람이 언제나 같은 순간에 같은 것을 원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24살에는 그런 걸 머리로 봤다면 지금은 조금은 실제 삶을 살아본 사람의 입장에서 보게 된 것 같다. 재미있는 건 그때의 내가 마지막에 남긴 말이다. “아마 서른 살쯤 다시 보면 또 다른 느낌을 받을 것 같음.” 서른 살은 한참 지나버렸지만 정말 다시 봤고 그때의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다른 영화가 되어 있었다.


덧붙임 1. 에이프릴의 마지막 선택에 대해서

영화를 다 보고 나서 가장 오래 생각했던 건 역시 에이프릴의 마지막 선택이었다.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는 그 장면을 당연히 에이프릴의 자살이라고 받아들였던 것 같은데 이번에는 조금 다르게 보였다. 에이프릴은 죽으려고 했던 게 아니라 임신을 끝내려고 했던 게 아닐까. 물론 자신이 하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지는 알고 있었을 것이고, 아무 일 없이 살아남을 거라고 순진하게 믿었던 것 같지도 않다.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알면서도 감수하고 한 선택에 가까워 보였다. 그래서 나는 그 장면을 단순히 ‘죽기 위해 한 행동’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그리고 중요한 건 파리에 갈 수 있느냐 없느냐만의 문제도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파리 계획이 틀어졌기 때문에 충동적으로 임신을 끝내려 한 것이 아니라, 에이프릴에게는 그 임신 자체가 원하지 않는 것이었다. 프랭크에게 셋째 아이가 생긴다는 것이 현실적인 문제였다면 에이프릴에게는 자신이 그렇게 벗어나고 싶어 했던 삶 속으로 다시 한번 더 깊이 들어가는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에이프릴의 마지막 선택에 동의한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왜 그런 선택까지 갔는지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특히 이 영화가 1950년대를 배경으로 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 그랬다.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일하고 살고 싶었던 여자에게 허락된 선택지가 지금보다 훨씬 적었던 시대였으니까. 그래서 에이프릴의 마지막은 단순히 한 부부의 비극적인 결말이라기보다 끝까지 자기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싶었던 사람이 결국 선택할 수 있는 것이 거의 남지 않았을 때의 결말처럼 느껴졌다.

덧붙임 2. 잭과 로즈도 30대가 되었다

이 영화를 다시 보고 배우들에 관한 이야기를 찾아보다가 재미있는 사실을 알게 됐다. <타이타닉>을 찍을 당시 20대 초반이었던 케이트 윈슬렛과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레볼루셔너리 로드>를 촬영할 때는 둘 다 30대 초반이 되어 있었다. 배 위에서 처음 만나 며칠 만에 세기의 사랑을 하던 두 사람이 10여 년 뒤 다시 만나서는 아이 둘을 키우며 서로에게 소리 지르고 상처 주는 부부를 연기한 셈이다. ㅋㅋ 물론 전혀 다른 영화고 전혀 다른 인물들이지만, <타이타닉>의 둘을 기억하는 입장에서는 이것만으로도 묘하게 재미있다.

더 재미있는 건 이 영화의 감독 샘 멘데스가 당시 케이트 윈슬렛의 실제 남편이었다는 사실이다. 케이트와 디카프리오는 <타이타닉> 이후 오랫동안 절친한 친구로 지냈는데, 케이트는 절친인 디카프리오와 부부를 연기하고 그 모습을 실제 남편이 연출한 셈이다. 심지어 둘의 부엌 사랑씬(ㅋㅋ)까지 남편이 직접 연출했다. 정작 디카프리오와 샘 멘데스는 별로 개의치 않았는데 케이트 혼자 이 상황을 꽤 이상해했다는 인터뷰도 있다. 케이트가 이 작품의 성사 과정에 적극적이었다는 것도 재미있다. 원작에 매료된 케이트가 남편인 샘 멘데스에게 원작을 권하고 디카프리오에게 각본을 보내는 등 두 사람을 연결하는 데 직접 나섰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이 비하인드를 알고 나니 24살 때 남겼던 글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그때의 나는 “다시 만난 둘의 그때와 다른 느낌의 연기도 좋았다”​고 써놨다. 실제로 잭과 로즈를 연기했던 두 배우도 그 사이 10년이라는 시간을 보내고 30대가 되어 프랭크와 에이프릴로 다시 만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영화를 봤던 나 역시 24살에서 37살이 되어 다시 이 영화를 봤다. 사랑만 있으면 세상 끝까지 갈 것 같았던 20대의 두 배우가 30대가 되어 사랑만으로는 결혼생활을 지킬 수 없는 부부를 연기했고, 그걸 보던 나도 결혼과 두 번의 출산을 지나 완전히 다른 자리에서 같은 영화를 다시 보고 있었다. 어쩌면 그래서 이번의 <레볼루셔너리 로드>가 더 다르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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